본문 바로가기

오늘도 읽는다/한국사

한국사능력시험 56회 오답노트

728x90
반응형


고구려 4C
소수림왕 : 체제정비 - 中 전진과 수교 , 불교 공인(372), 태학설립(372), 율령반포(373)

삼국의 대외 항쟁

660 백제멸망( 의자왕 + 황산벌의 계백 ↔ 신라 무열왕 + 김유신 )
⇀ 660~ 663 백제 부흥운동 - 복산 . 도침 ( 주류성 , 충남 한산 ) / 흑치상지 . 지수신 ( 임존성, 충남 예산) + 왕자 부여풍 + 日 수군의 지원 : 백(촌)강 전투(663)
668 고구려 멸망 ( 보장왕 ↔ 신라 문무왕) ⇀ 670~ 673 - 고연무 ( 오골성) , 검모잠 ( 한성) + 왕자 안승(금마저) + 신라 지원
⇀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왕 (670)⇀보덕국왕(674) ⇀ 신문왕 때 진골 신분 부여, 경주 안치(683) ⇀안승의 조카 대믄의 반란으로 보덕국 폐쇄 (684)

발해 - 수취제도 : 조세 ( 조. 보리. 콩 등 곡물) , 공물 ( 베, 명주 , 가죽 등 특산물 ), 부역( 궁궐, 관청 등의 건축에 국민 동원)
경제활동 - 무역 대당무역 발달 [ 산둥반도 덩저우에 발해관 ( 숙소 ) 설치 , 서경압록부 중심 ] , 대일 무역 발달 ( 동경 용원부) +일본도, 신라와도 무역 ( 남경 남해부) +신라도
+거란도+영주도 ( 당과의 교역 )⇀ 발해 5도

문왕 ( 대흠무) - 정혜공주묘 (둘째) [ 中 돈화현 (동모산 인근) 육정산 근처 ] - 1949년 출토 , 굴식 돌방무덤 , 모줄임 천장구조 ( 고구려의 영향) / 벽화 X , 돌사자상( 힘차고 생동감) 출토
정효공주 묘( 넷째) [ 中 화룡현 ( 중경 인근 ) 용두산 근처 ] - 1980년 출토, 벽돌 무덤 ( 당 영향 ) , 평행 고임 천장 구조 ( 고구려의 영향) , 벽화 O (ex 12명의 인물도) , 고분의 봉토 위에 벽돌 탑 조성 ⇀ 발해의 독특한 양식

공통점 - 4.6 변려체, (묘) 지석 발견




후고구려 (901) - 궁예 [신라 왕족⇀ 버림받아 신라에 적대적, 양길(원주)의 부하 ( 초적 ⇀ 호족) ]
송악(개성)에 도읍 ⇀ 철원 천도(905) 국호 : 마진 (904) ⇀ 태봉 (911) / 연호 : 무태 (904) ⇀ 성책 (905) ⇀ 수덕만세 (911) ⇀ 정개 (914)
경기도 .강원도 일대 차지
관제 : 9관등제 , 광평성 설치 ( 大 광치내. 시중) , 지나친 조세 수취, 전제 정치 ( 미륵 신앙 이용)

고려의 지방 행정 조직
특수행정구역 - 향 . 부곡(농업) . 소 (수공업) .역 (교통). 진 : 신분상 양민, 세금 부담 ▲ , 거주 이전 금지, 과거 응시 불가, 국자감 입학 불가
공주 명학소의 난 (1176) 을 계기로 소멸 시작 ▻ 조선 전기 면리제 정착으로 완전 소멸

10C말 성종 ( 981~ 997) - 최승로 '시무 28조 ' 수용 ( 6두품 출신 유학자 , '5조 적정평' ) - 유교 정치 실현 (유불 융합 O , 불교탄압 X)
- 12목에 최초로 지방관 파견 ( 중앙 집권 강화 의도) , 향리( 향직)제도 마련(지방 세력 견제) ex ) 당대들을 향직 중 제일 높은 '호장'으로 함, 연등회 .팔관회 폐지 (불교 행사 폐지)
- 애민 정책 : 의창 ( 춘대추납, 전국 군현) , 상평창 ( 물가조절기관, 개경.서경.12목) , 사직단과 환구단 설치

고려말 : 사략(공민왕,1357) - 이제현(익재) ,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유교사관 반영


14C 후반 - 왜구
우왕때 1380 - 황산(남원 운봉)대첩 (이성계) → 황산대첩비 (조선 선조 때 건립 but 일제 강점기 훼손 )

조선 왕조의 개창
고려 말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한 후, 신진 사대부 세력은 점차 고려 왕조의 테두리 안에서의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려는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혁명파로 분화되었다. 정도전 등의 혁명파 사대부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권문세족과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파 사대부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조선경국전」

조광조의 사상과 개혁정치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서울에서는 홍문관과 육경·대간이 등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대궐에 모아 놓고 친히 대책으로 시험한다면 인물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하지 않았던 일이요, 한나라 현량과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 「중종실록」

연산군 (1494~1506)

사화발생 - 갑자사화 (1504) → 윤비 폐출 사건(연산군 생모 페비 사건): 임사홍 주도로 갑자사화일으킴→ 결과:한명회·정인지 부관참시,훈구·사림 모두 희생

---- 중종 (1506~1544)

| 중종반정(1506) - 초기:왕권↓, 후기: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등용→ 조광조(정암)
| 조광조의 개혁 정치 - 훈구파의위훈(거짓공훈)식제주장 ,현량과(천거관리동용)실시→사림등용 목적 , 향약 실시 ex) 中 여씨향약 / cf 유향소폐지주장
| 소격서(도교 행사주관관청) 폐지, 도학 정치(이상적 유교 정치 실현) 주장→도덕·의리중시 , 「소학(주자의 생활 윤리서) 보급·강조→ 도학실천 목적
| 경연 강화, 언론 활동 활성화, 방납폐단 시정 주장
---- 기묘사화 (1519):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에 대한 훈구 세력의반발(走肖為王)

인종 (1544~1545) 母 장경왕후 [ 윤씨 대윤, 윤임 일파 ] → 일찍 사망 |

명종 (1545~1567) 母 문정왕후 윤씨(여인천하) → [ 소윤, 윤원형 일파 ] |
을사사화(1545) - 원인 : 외척 간의갈등 , 결과 : 척신들이 정국 운영 주도

임진왜란의 전개
· 도내의 승군을 선발, 영규를 장수로 삼아 청주의 왜적을 토벌하였다. 의병장 조헌이 협동하여 군 사를 전진시키자 청주의 왜적이 도망쳤다. 영규와 조헌이 군사를 옮겨 금산(錦山)의 왜적을 치다가 모두 싸움터에서 죽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매우 애석해 하고 또 그들의 의기를 장하게 여기고 있다. 「선조실록」
· 군주는 백성에게 부모의 도리가 있다. 백성이 오랑캐의 조정으로 잡혀가, 장차 오랑캐 나라의 백성이 되게 되었으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의리에 의거해 우리나라 포로를 모두 쇄환시켜 두 나라의 우호를 다지게 하라고 하여 한번 그들의 뜻을 떠보는 것이 마땅하다. 사신의 칭호를 회답쇄환사라고 하는 것도 한계책일 것이다. 「선조실록」

임진왜란(1592, 선조)
전개 - 의병의 항쟁 - 구성: 농민 주축, 전직 관리, 사림, 승려
- 성격: 향토 지리에 적합한 전술구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상당수 관군에 편입
- 활동(인물) - 경상도 : 정인홍,곽재우(북인,최초 의병) / 전라도 :고경명, 김천일 / 충청도: 조헌·영규(700의총) / 함경도 길주:정문부(북관대첩비) / 묘향산: 서산대사(휴정)/
금강산:사명대사(유정)

서원과 향약
주세붕 공이 풍기군수가 되어 묘우(廟宇)를 창건하였다. 다음 해 8월 문성공 안유의 영정을 봉안하고, 이어 안축과 안보를 배향하였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주세붕이 비로소 서원을 창건할 적에 세상에서 자못 의심했으나, 그의 뜻은 더욱 독실해져 무리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비방을 극복하여 전례 없던 장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 선정의 자취가 남고 향기가 뿌려진 곳, 예를 들어 최충, 우탁,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같은 이가 살던 곳에 모두 서원을 건립하게 될 것입니다.
풍기 군수 이황은 삼가 관찰사께 글을 올립니다. … 선비의 학문이 서원에서 역량을 얻게 될 뿐 만 아니라 나라에서 인재를 얻는 데도 틀림없이 서원이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 것입니다. 임금께 아뢰주시어 서적을 내려 주시고 편액을 내려 주시며 겸하여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면 문교(文教)가 크게 밝아질 것입니다. 「퇴계집」

서원 철폐
대원군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둑의 소굴이 됨에 있어서랴." 드디어 형조와 한성부의 나졸들을 풀어서 대궐 문 앞에서 호소하려는 선비를 강 건너로 몰아내버렸다. - 박제형, "근세조선정감"
- 흥선대원군은 만동묘를 포함한 서원을 철폐하여 47곳만 남겨두었는데, 이 과정에서 유생의 반발을 샀다.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사대교린
사대 :
- 태조 : 정도전'표전문'사건 → 명과 대립 - 고명·금인 문제 : 명이 태조 불인정, 여진족 처리문제, 종계 . 변무 문제 : [ 대명회전 ]에 이성계가 이인임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는 문제 → 선조 때 해결
- 태종 이후 : 원만한 관계 ex) 하정사(정월 1일 ) ,성절사 ( 황제, 황후 생일) ,천추사 (태자 생일) , 동지사 (12월) - 조천사 ( 명: 천지국) cf 조선 후기 청에 가는 사신 : 연행사
의미 : 자주적 실리 외교 , 공무역 → 조공품과 회사품의 교환

19C 세도 정치 (순조-헌종-철종)
왕 ↓, 안동 김씨(외척 가문) ↑ / 삼정 문란: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징수), 환곡(춘대추납, 1/10 → 고리대, 부정大)
반란 - 홍경래의 난(1811, 순조)- 몰락 양반 홍경래 + 영세 농민중소상인광산 노동자합세, 평안도 서북 지역→ 평서 대원수 자처, 전국적X

홍경래의 난(1811, 순조)
조선시대 평안도에서 배출된 소과 합격자(생원·진사)는 17세기 까지는 전체의 2%에 미치지 하다가 18세기 전반부터 증가하여 19세기 전반에는 7%, 후반에는 10% 가까이까지 급증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평안도의 경제적 성장, 국가 정책의 변화, 중국 및 서양 문물과의 접촉, 교육 기관의 확대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 지역 문신(文臣)들은 중앙 정계에서 차별받고 소외 당하였다. 평안도를 포함한 서북의 인사들은 과거를 통과한 후 관직생활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승문원 분관에 들지 못하였으며, 참상관으로 올라간 후에는 통청을 받지 못해 권위 있는 청요직에 들어갈 수 없었다.
평안도 사람은 설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고 ⋯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서울 사람은 서북 지방과 혼인 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고,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 「택리지」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와 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이 뚜렷하고 문물이 아울 러 발달한 곳이다. ⋯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자 있겠는가.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오로지 갖고 노니 어진 하믈이 재앙을 내린다. 「순조실록」

3차 (을미개혁)
제4차 김홍집 내각 수립(1895. 8.24) / 개혁 내용 :단발령, 태양력(1895. 11. 17.→ 양력 1896. 1.1), 건양 연호, 종두법, 우체사, 소학교령공포 → 소학교 설치
을미의병(1895)과 아관파천(1896)으로 중단

흥선 대원군의 정치 (1863 ~1873)
통상수교거부 - 1866.1月 : 병인박해 - 1866. 7月 제너럴 셔먼호 사건 ( 평양 대동강, 평안도 감사 박규수 화공 작전) →1866. 9月 병인양요 - 프로즈 +강화도: 정족산성(양헌수), 김포의 문수산성(한성근) ,강화성 약탈: 외규장각 조선왕조의궤(세계 기록 유산) 약탈, 2011년 반환

병인양요(1866. 9.)
양헌수라는 사람이 순무천총으로 있었다. 몰래 정족산성 내의 전등사로 가서 주둔하였다. 전등사는 높은 산 위라 매복하였다가 한꺼번에 북과 나발을 불며 좌우에서 총을 쏘았다. 장수가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고 양인(洋人) 십여 명이 죽었다. … 강화도 재물을 모두 빼앗아 쌓아 놓았다가 시월 초에 제 배에 싣고 다 도망갔다. 「병인양난록」
1975년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조선 시대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를 알렸다. 그 후 1990년대 초 한국 정부가 반환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11년에 '5년마다 갱신이 가능한 대여 방식'으로 반환되었다.

동학농민 운동(1894)
2기 3月 무장 봉기 <1차농민봉기> 남접주도 ex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안핵사이용태 농민 탄압→ only 동학교도 탄압 / 고창 무장에서 봉기(창의문 발표) 고부 백산에서 격문과4대 강령 발표(호남 창의대장소 명의)
황토현 전투 (4月) - 장성군 황룡촌 전투 승리(4月)→ 농민군: 전주성 점령(4.27) ↔ 초토사홍계훈 ※ 홍계훈 기념: 장충단(공원)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지키려다 순장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고 있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백산 봉기 격문, 1894. 3.

출처-위키백과


안중근
을사늑약 후 삼흥학교 설립 / 1907년 연해주 망명 → 정미의병 참모중장 /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사살 / 뤼순 감옥에서 사형(1910) / [ 동양평화론 ] 저술 : 한· 中· 日 → 미완성 공동 의회 구성 ,공동 군대 편성 ,공동 통화 발행

신민회 (1907~1911)- 원래 미국(LA)에서 대한 신민회 조직 (1907) :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이동녕, 이동휘 등 민족 지도자 대부분 참여(800여 명), 독립 협회 청년 멤버 대부분 참여 / 비밀 결사(기독교인多), 최초 공화정 목표, 전국적 조직(총본부 -감독부 -총감소 -군감소)
활동-표면적 - 교육: 대성학교(1908, 평양, 안창호), 오산학교(1907, 정주, 이승훈)
- 산업 : 태극서관(서적 출판, 평양· 서울·대구), 자기회사(평양)
- 언론 : 대한매일신보(신민회기관지), 소년(협력지), 조선광문회(학술지, 민족 고전 간행)
- 청년 학우회 조직(1909, 안창호) → 흥사단(1913, 샌프란시스코)
- 내부적 : 무장 투쟁준비 (→독립운동 기지 건설) ex) 이회영·이시영(부자6형제)+ 양기탁
해산: 105인 사건(1911)

3.1 운동 [ 고종의인산날(3.3) ]
전개- 1단계: 종교인 대표(33인, 태화관) + 학생(탑골 공원)→ 평화주의 노선 / 2단계: 도시로!! ex 경성 철도 노동자와 총독부 인쇄공의파업 동반 3단계 : 농촌으로!! → 무력 저항으로 변모( 토지 조사 사업에 대한 불만) , 해외로!! ex 만주, 연해주, 동경,오사카, 필라델피아 등

☆ 만세 운동 비교 - 6·10만세 운동(1926) - 순종의 인산일,종로(창덕궁 돈화문) /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 11.3) -신간회 후원 ,한·일 학생 간의 충돌

만주 (무장 독립 전쟁) - 봉오동 전투(1920.6. 7): 대한 독립군(홍범도)+ 국민회(독립)군(안무)+ 군무도독부군(최진동)= 대한북로독군부
- 청산리 대첩(1920. 10)- 대한 독립군(홍범도)+ 북로 군정서군(김좌진) / 전투: 백운평·천수평· 고동하·어랑촌 전투
3부 성립 - 만주 지역에 만들어진 자치 정부 ex ) 민정 기관(정치)+군정 기관(군사)
참의부 (1923, 임정 직속), 정의부 (1924, 지청천·양기탁), 신민부 (1925, 김좌진, 대종교 주축) → 각각 행정·입법·사법부 구성 / 국내 침투 작전 전개


1930's 민족 말살 통치
내용 - 황국 신민화 명목 : 내선일체, 일선동조 / 민족 말살 통치 본격화(1937~), 황국신민 서사 암송(1937), 우리말·우리 역사 교육 금지(1938)
신사 참배, 정오묵도, 궁성요배 / 창씨개명 법안 마련(1939)→ 시행(1940)




전두환 정부: 제5공화국
국정 지표 : 정의사회 구현(ex 1981. 12. 공직자 윤리법 제정). 복지국가건설 / 강압 정책 : 민주화 운동 탄압
유화 정책 : 국풍 81(대규모 문화 행사) /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1983) / 컬러 TV 보급/ 프로야구·축구·씨름 출범/ 야간 통행금지 해제
경제: 3저 호황 (1986~)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 국제 무역 수지 흑자 달성 ※ 수출 100억 달러 달성 (1977)
기타: 88 서울 올림픽 유치, 아웅산테러

6月 민주 항쟁(1987. 6) → 넥타이 시위대(화이트칼라 계층 참여) 출현
- 구호: "직선제 개헌" 요구→ 4·13호헌 조치→ "직선제 개헌", '호헌철폐" 요구
- 전개: 1천만 서명 운동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 1) →4·13 호헌 조치 발표 → 이한열 사망 사건(1987.6.9)
- 결과 - 6·10 국민 대회 개최→ 6·29 민주화 선언
제9차 개헌(1987. 10)- 대통령 직선제 / 대통령 5년 단임제 / 의의: 여야 합의 개헌
제13代 대선(1987. 12) : 노태우 어부지리당선(야당 후보 분열)→.: 평화적 정권 교체 실패

1990's 노태우 정부
1988. 7·7 특별 선언(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북한을 선의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대화 제안
1989.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 자주·평화·민주의통일3원칙 발표 / 최초 점진적 통일 방안 제시
1990. 최초 남북 고위급(총리) 회담 시작
1991. 남북UN 동시가입 / 12.13. 남북 기본 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 7·4남북 공동 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 재확인, 남북 정부 간 최초 공식 합의 / 상대방을 무력으로침략X→ 상호 불가침 / 남과 북의 관계를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향해서 나아가는 "잠정적 특수 관계"로 규정 / 상대방의 체제 인정하고 존중 화해·협력 / 군사 당국자 간 직통전화 가설/ 남북 군사 공동위원회 설치 / 판문점 남북 연락사무소설치
12. 31.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서명, 92. 1): 핵의 평화적 이용







출처 - 전한길 필기노트 짱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