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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는다/한국사

21년 경찰시험 2차 한국사 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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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여 - 왕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 - 여름철에 얼음 사용, 순장, 간음자.투기한 부인>사형
2) 고구려 - 무덤 :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돌무지무덤) 주변에 소나무,잣나무 심음
3) 옥저 - 골장제(세골장), 가족 공동묘 > 쌀항아리(목곽 입구에 쌀항아리 매달아 놓음) > 영혼 숭배
4) 신라 - 통일전 : 돌무지 덧널무덤 ( 적석 목곽분) -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을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음
only 신라 ,도굴 어려운, 시신 추가매장 불가 (단장무덤) , 벽화x, 규모 大

선사시대 유적지
구석기 - 전기 -단양 도담리 금굴 유적지 : 한반도 최고 ( 70만년 전)
공주 석장리 (1964) : 남한 최초 , 전기~ 후기 모두 출토
경기 연천 전곡리 (1978) :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 미군병사가 발견> 모비우스 학설 반박) 출토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청원 만수리 유적
중기 - 덕천 승리산 동굴 : 최초 인골 출토
옹기 굴포리(1950-1954) ,북한최초
평양 역포 대현동
단양 상시리 바위그늘 : 남한 최초 인골 출토
강원 양구 상무룡리 : 흑요석기
강원 명주 심곡리 , 제주 발레못 동굴
제천 점말 동굴

후기 - 종성 동광진 유적지 : 한반도 최초 발견 (1933)
충북 청원 노현리 두루봉 동굴 : 어린아이 유골
2개 흥수아이 ,"장례에 꽃을 뿌린 흔적"
평양 만달리 , 단양 수양개, 제천 창내
남양주 호평 ,제주 서귀포 천지연
황해도 평산 해삼리

* 사람 화석 ( 인골 ) 출토 유적 : 덕천 승리산 동굴( 승리산은 최초 ) , 단양 상시리 바위 그늘 ( 상시인 ) , 청원 두루봉 동굴 (흥수 아이) , 평양 만달리 (만달리 ) , 평양 역포 대현동 ( 역포아이)

신석기 - 제주 한경 고산리 :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변화 모습
- 평양 남경, 황해도 봉산 지탑리 : 탄화된 좁쌀
- 웅기 굴포리 서포항 유적 : 개,뱀,말 형상 호신부 출토 (주술적 의미) ,동참신전앙와장(태양 숭배) - 시신 머리를 동쪽으로 배치
- 김해 수가리, 서울 암사동 ,강원 양양 오산리 (백두산 흑요석기 ),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일본산 흑요석기)
- 경기 하남 미사리 , 평남 온천 궁산리 ,청진 농포동 유적( 여성 조각품 출토) , 강원 양양 지경리, 경남 창녕 비봉리 조개더미 ( 패총, 통나무 배) : 내륙에서 최초 발견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다 ( 500년 (음) )
22년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 064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류각(臨流閣)]

김헌창의 난 822년(헌덕왕 14년) -신라 무열왕(武烈王)계의 유력한 귀족이었던 김헌창(金憲昌)이 자신의 부임지였던 웅천주(熊川州)에서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원효 - 불교대중화 : 정토종(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정토에 극락왕생 ) ,일심사상 : 모든 것이 한마음 ( 종파 극복)
*저서 : 십문화쟁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판비량론, 아미타경소, 해심밀경소 등


삼국의 대외 항쟁
648 나.당 연합 결성(진덕여왕)
660 백제 멸망 ( 의자왕 + 황산벌의 계백 <> 신-무열왕 + 김유신 )
660-663 백- 부흥운동 -복산.도침 ( 주류성, 충남 한산 ) ,흑치상지. 지수신( 임존성, 충남 예산) + 왕자 부여풍 + 일 수군의 지원 : 백(촌)강 전투 (663)
668 고구려 멸망 ( 보장왕 <> 신 - 문무왕 )
670 - 673 고 -부흥운동 : 고연무 (오골성) ,검모잠( 한성) + 왕자 안승 (금마저) + 신- 지원
670 나.당 전쟁 - 이유 :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 - 당) 웅진 도독부 (공주 ,660 ) 설치 : 부여융을 도독으로 임명 ( 664) - 공주 취리산 회맹(665)-부여융 +문무왕

ㄱ) 견훤, ㄴ) 고려 태조
발해는 대조영이 건국한 699년에 천통(天統)이란 독자적인 연호 사용하였다.

거란 1차 (993, 성종) : 소손녕 80만 <> 서희의 외교담판 ( 강동 6주 획득, 송과 외교 관계 단절 약속) > 압록강 진출
최승로 '시무 28조 ' 수용 - 유교 정치 실현 ( 유불 융합 0, 불교탄압 x)
-12목에 지방관 파견 (중앙 집권 강화 의도)
-향리(향직)제도 마련 (지방 세력 견제) ex) 당대등을 향직 중 제일 높은 '호장'으로 함
-노비 환천법 (무례한 놈 다시 노비로!) ,공신 자제 등용 ( 광종 때 숙청된 공신, 유가족 포용 목적)
-연등회, 팔관회 폐지 (불교 행사 폐지)

삼별초 항쟁 (1270~1273) : 강화도 > 진도(용장성) > 제주도 -김통정 지휘, 항파두리
-배중손 지휘, 승화후 왕온 추대

1) 승려 : 의천 -교단 통합 노력 -1단계 : 교종끼리 통합 > 흥왕사를 근거지로 화엄종 중심 통합
2단계 : 교종 중심 + 선종 통합 > 국청사 창건 (천태교학 강의) > 해동 천태종 창시

나) 사료
해동제국기 서문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 신숙주(申叔舟, 1417~1475)에게 명하여 해동 여러 나라에 대한 조빙(朝聘)으로 왕래한 연고와, 관곡(館穀)을 주어 예접(禮接)한 규례를 찬술하라 하시기에 신은 명을 받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옛 문헌을 상고하고 보고 들은 것을 참고하여 그 지세를 그려서 대략 세계(世係)의 본말과 풍토의 숭상하는 바를 서술하고, 우리나라에서 응접하던 절차까지 덧붙여서 편집하여 책을 만들어 올렸다.

3) 1466년(세조 12) 직전법을 실시하면서 수신전과 함께 휼양전도 폐지되었다.

패관잡기의 저자 어숙권. 그는 서얼이었다. 그런 만큼 서얼을 차별하는 세태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1415년(태종 15) 적서(嫡庶)를 구별하는 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서얼 자손도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다. 성종 때 법전인 경국대전이 편찬되면서부터는 서얼의 벼슬길이 원천 봉쇄됐다.

첫번째 사료 - 정약용의 탕론
"무릇 천자란 어떻게 해서 있는 것인가? ".
이 물음에 대한 해명이 실은 [탕론]의 본론이다.

두번째 사료 - 여유당전서』제1집 제10권 문집
거중기의 발명과 화성 축조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활차(滑車)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것은 두 가지 편리한 점이 있으니, 첫째는 사람의 힘을 줄이는 것이고, 둘째는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입니다.

정약용 ( 여유당, 다산) -18c 후반 정조 때 활약, 과학 기술과 상공업 발전에도 관심
-여전론 : 마을 단위 (1여 : 大여장)로 공동 노동, 공동 경작 but 노동에 따른 차등 분배(너무 이상적) >(타협안) 정전론 주장
※ 저서 - [여유당전서](1934년 조선학 운동, 정인보 간행) , [목민심서](지방관의 도리),[경세유표] (중앙 정치 기관 개혁) ,[흠흠신서] (형옥 관련 법률서)
-전론(여전론 주장), 탕론(민본적 왕도 정치) , 원목(지방관이민(民)위해 존재),기예론 (기술 문화 장려 > 주교, 거중기, 화성 축조), [마과회통]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5월 23일 을사 1번째기사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에 대해 치계하다
만동묘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유교(遺敎) 따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숙종 30년(1704)에 건립하고, 임진왜란때 조선 원군을 파견한 명나라 신종(神宗)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던 곳이다.

조선책략》(朝鮮策略)은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던 청국인 황준헌(黃遵憲, 황쭌센)이 1880년경에 저술한 외교문제를 다룬 외교 방략서이다.

이 책은 1880년 고종 17년 김홍집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가져와서 고종에게 바쳤다.[5] 이 책은 조선의 보수적인 유생들에게 심각한 반발을 유발하여 1881년 영남 만인소 사건〉 등이 일으났으며, 개화를 주장하는 새로운 세력들에게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었다. 또한 고종 19년 1882년 5월 22일 청나라의 주선으로 미국과의 수교(《조미수호통상조약》)를 맺는데에도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한청통상조약

1899년(광무 3년) 9월 11일 대한제국의 전권 박제순과 청나라의 전권 서수붕 사이에 체결된 한.청 양국의 우호.왕래.통상에 관한 조약문이다.

1907년 신문지법.보안법 제정
4. 헤이그 특사파견
7. 20. 고종 강제 퇴위 < 헤이그 특사 파견 구실로 순종에게 양위 강요
7. 24.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 차관 정치 -일본인차관 , 통감부의 내정 간섭 심화
7. 31. 군대해산 (<> 정미의병) < 순종 황제의 군대 해산 권고 조칙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3.1 운동 기록
박은식
(1859-1925)
1898 독립협회 가입
황성신문 기자
1904 대한매일신보 기자
1906 대한 자강회 가입
1907 신민회 가입
1908 서북학회 활동
1909 대동교 창시
유교 구신론 발표
1910 조선 광문회 조직 (최남선 함께)
1912 상하이 동제사 조직
1915 [한국 통사] 편찬
대동 보국단 조직(신규식 함께)> '진단'잡지 발행
1919 노인 동맹단 조직
1920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5 임시 정부 2대 대통령으로 선임


한인애국단선언문

(한인)애국단 (1931. 10., 김구 , 임정 침체 극복 노력과 만주 사변을 계기로 조직)
-이봉창 (1932. 1. 8) -장소 : 日 도쿄, 대상 : 日 히로히토 일왕 폭살 시도
의의 : 상하이 사변 (1932) 의 계기 ( 中 신문 보도 문제 삼아 상하이 점령)

-윤봉길 (1932. 4. 29) - 전승 기념식 장소 : 상하이 홍커우(홍구) 공원
- 의의 -중 국민당의 임정 지원계기 > 낙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 편성 , 임정 청사 상하이 떠나 이동 (항저우 , 1932)
中 內 무장 투쟁 허용 , 한국 광복군 창설 계기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선언⋅강령

1945년 8월 28일

국내 : (조선) 건국 동맹
(비밀 결사 , 1944. 8)
주도 : 여운형
해방직후 조선건국 준비 위원회 결성
(건준위, 1945. 8. 15) > 위원장 : 여운형 , 부위원장 : 안재홍
활동 : 치안대, 인민 위원회 조직
건준위 강령 - 완전한 독립 국가 건설
- 민주주의 정권 수립
- 일시적 과도기에 대중의 생활 확보
🔻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1945. 9. 6)
주석 : 이승만
부주석 : 여운형
국무총리 : 허헌
좌익주도 , 우익 불참, 미군정 불인정 > 실패

(가) 진보당 강령
(나) 4.19 혁명

이승만의 장기 집권 노력

  • 제 1차 개헌 (1952, 발췌 개헌) "부산 정치 파동 "> 대통령 직선제 , 양원제 규정 O but 시행 X
  • 제 2차 개헌 ( 1954, 사사오입 개헌) : 개헌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이승만) 중임 제한 적용 X
  • 독재 -진보당 사건(1958. 1): 조봉암 사형 집행 (1959.7 ) (<간첩 혐의 , 2011년 무죄)
  • - 신국가 보안법 (1958. 12, 보안법 파동 ) : 군대 內 + 정치 세력까지도 all 포함
  • - 경향신문 폐간 (195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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