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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는다/한국사

한능검 47회 오답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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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근초고왕 - 고구려 평양성 공격 (371) → 고국원왕 전사 (371)
(다) 광개토 태왕 - 신라에 침입한 왜 격퇴 (400) → 금관가야 쇠퇴
(가) 눌지 마립간 + 비유왕 - 나 · 제 동맹 (433)

발해의 대외 교류

무왕(왕 대무예)이 일본에 사신과 국서를 보냈다는 내용을 통해 (가) 국가가 발해임을 알 수 있어요.
발해 무왕은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어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신라와도 교류하였습니다.
발해는 거란도, 영주도, 일본도, 신라도 등 의 교통로를 통해 주변 국가들과 교류하였는데, 목축과 수렵이 발달하여 모피, 녹용 등을 수출하였어요.

통일 신라의 체제 정비

지도에서 전국이 9개의 주로 나뉘어 있고, 중원경, 금관경 등 5소경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구역임을 알 수 있어요.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수도 금성이 동남쪽에 치우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주요 지역에 5소경을 두었습니다.
신라는 관리 감찰의 업무를 관장하는 정부를 두었어요.

원효의 활동

설총을 낳은 이후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하였으며, 무애라는 도구를 만들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는 내용을 통해 (가) 인물이 신라의 승려 원효임을 알 수 있어요. 원효일심 사상화쟁 사상을 주장하며 종파 간의 사상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어요. 또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불교 대중화에 기여하였어요.

원효는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논산 관촉사에 있는 불상으로 '은진 미륵'이라고도 불리며, 고려 광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는 내용을 통해
(가)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이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임을 알수있어요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개성 있는 모습이며,
우리나라에서 조성된 가장 큰 석조 불상이에요.


조선의 건국과정

명이 철령 이북의 영토를 요구하자 우왕과 최영은 이에 반발해 요동 정벌을 추진하여 이성계에게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도록 하였어요.
하지만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멈추고 정벌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회군하여 개경으로 돌아와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어요.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조준 등 일부 신진 사대부와 함께 과전법을 제정하고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고려 왕조의 유지를 주장하는 정몽주 등을 제거 하고 조선을 건국하였어요. 그리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 건설을 시작하였어요.
따라서 이를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위화도 회군(1388) (다) 과전법 제정(1391) (나) 한양 천도(1394)입니다.

관수관급제

관에서 거두어 관리에게 지급한다는 뜻이에요.
관리들이 조세를 과하게 거두는 경우가 생기자, 이러한 부정을 막기 위해 성종은 관청이 직접 수확량을 조사해 조세를 걷은 후
토지 수조권을 가진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관수관급제를 시행하였어요.

(대왕대비가) 전지하기를, "사람들이 직전(職田)이 폐단이 있다고 많이 말하기에 대신에게 의논하니,……
'우리 나라 사대부의 봉록(俸綠)이 박하여 직전을 갑자기 혁파 할 수 없다.' 하므로, 나도 또한 그렇게 여겼는데,
지금들으니 조정 관원이 그 세(稅)를 지나치게 거두어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한다. ……"하였다.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직전의 세(稅)는 관에서 거두어 관에서 주면 이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전지하기를, "직전의 세는 소재지의 지방관으로 하여금 감독하 여거두어 주도록하라."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

1485 "경국대전" 완성

출처 - 우리 역사넷

향교

지방에 설치된 국립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 및 지방 관리와 서민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지방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치되었는데, 규모는 군현의 크기에 따라 달랐어요.
향교는 대성전 중심의 제사 공간, 명륜당 중심의 강학 공간,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에서 교수나 훈도가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제주 경재소에서 상언(上言)하기를, "대정·정의 두 고을에 비로소 향교를 설치하여,
두 고을 생도가 각각 50여 인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그 고을 사람으로서 경서에도 밝고 행실이 뛰어난 자를 뽑아서
훈도로 삼아 가르치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16C 훈구 <> 사림 (사화) > 사림집권
연산군 (1494-1506) 사화발생 -무오사화 (1498) <사초문제 - 조의제문(의제를 조문하는 글) -김종직 지음 > 제자 김일손 (사림) : 사관(사초 기록 관리)
🔛훈구 : 유자광,이극돈
사화발생 > 김굉필,정여창 유배, 김종직 부관참시,김일손 능지처참
갑자사화 (1504) < 윤비 폐출 사건 ( 연산군 생모 폐비 사건) : 임사홍 주도로 갑자사화 일으킴 > 결과 : 한명회, 정인지 부관참시 , 훈구,사림 모두 희생
큰아버지 "월산대군" 女 박신부인 자결 > 연산군 쫓겨남 > 남동생 : 박원종 (훈구) + 성희안 > 중종반정

중종 ( 1506~ 1544) -중종반정 (1506) -초기 : 왕권약화, 훈구파 집권 , 후기 :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등용 > 조광조 (정암)
- 조광조(김굉필의 제자) 의 개혁정치 - 훈구파의 위훈 ( 거짓 공훈) 삭제 주장 / 현량과( 천거 관리 등용) > 사림 등용 목적 > 훈구파 반발
- 향약 실시 , 소격서( 도교 행사 주관 관청 )폐지 , 도학정치( 이상적인 유교 정치 실현 ) 주장 > 도덕 , 의리 중시
- [ 소학 ] ( 주자의 생활 윤리서) 보급, 강조 > 도학 실천 목적
- 경연 강화, 언론 활동 활성화, 방납 폐단 시정 주장
기묘사화 (1519) :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에 대한 훈구 세력의 반발

제1차 진주성 전투(第1次晋州城戰鬪) 혹은 진주대첩(晋州大捷)은 조선 중기 당시 임진왜란의 한 공방전이다. 이 전투는 권율 행주대첩 이순신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이다.
제4차 평양성전투
1592년 1월 6일부터 9일까지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간에 평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월 8일 조선군은 이여백과 함께 남쪽 성을, 명군은 서쪽 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총공격을 하였다. 명군은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량기포 등 수많은 대포들을 평양성에 집중 사격하고 평양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의 8,000명의 군사가, 칠성문은 장세작이, 보통문은 양호가, 모란봉은 오유충과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했다. 이여송이 먼저 서에 오르는 자에게 은 50냥을 주겠다고 하자, 남방장수 낙상지가 먼저 성벽을 오르고 그의 군사가 뒤따라 올랐다. 이에 일본군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내성으로 물러났다.

균역법 (1750 , 영조) -1년 군포 2필 > 1필 (쌀 6두)
- 부족분 보충
- 결작 징수 : 지주에게 1결당 쌀 2두 징수 > 군역의 전세화
- 선무 군관포 : 일부 부유한 상민층에게 "선무군관" 칭호 부여 > 1년에 군포 1필 징수
- 잡세 징수 -어(장)세 , 염(전)세 ,선(박)세 -원래 왕실 재원 위해 임의 징수
- 균역청에서 일괄 징수 ( 동시에 어염세 감면)
결과 : 농민 혜택 O , but 일시적 - 결작이 농민에게 전가


학파의 형성 - 16C 중반부터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형성
동인 : 서경덕 , 이황 , 조식 학파 > 정여립 모반 사건 (기축옥사 , 1589) ,정철 건저 사건( 1591) 계기로 북인 : 서경덕,조식 학파 , 남인 : 이황 학파
서인 : 이이 학파 (>노론) , 성혼 학파 (> 소론)
북인 : 광해군 때 중립 외교 > 인조 반정 (1623) > 북인 몰락 > 서경덕 , 조식 사상 , 양명학 ,노장사상 배척됨
서인과 남인 : 현종 때 예송 > 서인 ( 송시열 , 송준길) VS 남인 ( 윤후, 윤선도, 허적 ,허목)

성리학 절대화 (교조화) : 서인 ex) 송시열 > "주자" 절대화

조선후기 상업 - 발달 -대동법 실시 > 상업 발달 촉진 - 조세의 금납화 > 화폐 유통 촉진 - 상평통보 : 숙종 때 허적 건의에 따라 발행 > 법정 화폐 ( 여러 기관에서 발행)

실학의 등장 (17~18C) - 발전 - 중농학파 (경세치용학파) : 경기 남인, 토지 제도 개혁 > 자영농 육성 (분배 강조)
이익 (성호) - 18C 전반 숙종 ~ 영조 때 활약 , 계승.발전 , 한전론 : 영업전 (생계 유지 위한 최소한의 토지) 매매금지 but 그 외 토지 매매 허용 > 하한선 제한
- 천주교 연구 but 비판 (배척) , 여섯가지 좀 : 노비제도, 과거제도, 양반 문벌제도 , 사치와 미신 , 승려 , 게으름
- 폐전론 : 화폐 경제에 부정적/ 붕당론 : 양반 수, 특권 제한 주장 , 성호 학파 형성
- 저서 : [성호사설] ( 천지, 만물 , 경사, 인사, 시문 부문 기술 ) , [ 곽우록 ] -국가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 제시, 한전론 기록

진경산수화 : 정선 - 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
-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회화의 토착화가 이루어짐
-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 바위산은 선 , 흙산은 묵으로 묘사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

조선후기는 회화사상 새로운 경향의 업적을 남겼는데 이는 진경산수화, 남종화,풍속화의 유행이다. 이러한 화풍들은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크게 4가지로 그 시대의 경향을 살펴보면 첫째, 조선중기에 유행했던 절파화풍이 쇠퇴하고 문인화, 남종화가 유행하였다. 둘째, 남종화법에 기반을 두어우리나라에 실재 존재하는 산천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가 남긴 업적은 남종화풍, 풍속화의 유행, 서양화풍의 유입들 이러한 새 경향의 화풍들을 수용하여 우리 산천에 어울리는 한국적인 화법을 구축한 일이다.
(사이트참조 : http://art2me.org/images/gamsang/KoreanArt/15jingyeongsansu.htm)

조선 전기 - 명종 1545 을사사화

·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권력 다툼 → 윤임 일파가 제거됨, 윤임과 연결된 영남·호남출신의 신진 사림이 피해를 입음
· 양재역 벽서 사건 : 양재역에서 문정 왕후 등을 비판하는 벽서가 발견됨 → 이를 구실로 윤원형 등이 반대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이언적 등 사림이 피해를 입음

이덕응이 자백하기를, "평소 대윤·소윤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는데,
그들과 함께 모반을 꾸민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계속 추궁하자 그는 "윤임이 제게 이르되 경원 대군이 왕위에 올라 윤원로가 권력을 잡게 되면
자신의 집안은 멸족될 것이니 봉성군을 옹립하자고 하였습니다."라고 실토하였다.
- "명종실록" -
출처 - 나무위키


흥선 대원군 정치(1863-1873) < 고종( 이명복,12세 王) 너무 어려 흥선 대원군이 섭정
통상수교거부- 1866.1月 : 병인박해 - 1866. 7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 평양 대동강 , 평안도 감사 박규수 화공 작전) -> 1866. 9월 : 병인양요 - 강화성 약탈 : 외규장각 조선왕조의궤 (세계 기록 유산) 약탈 ,2011년 반환

흥선 대원군 정치(1863-1873) < 고종( 이명복,12세 王) 너무 어려 흥선 대원군이 섭정
민생 안정책 ( 삼정 문란 시정) - 환곡 > 사창제 ( 마을 창고 만들어 자치적 운영, 大 사수) 실시 > 흥선 대원군 하야 후 유명무실

개화 - 사절단 파견 ( 일 요청시, 공식적 ) - 2차 : 1880, 김홍집이 황쭌셴이 지은 [조선책략]을 들고 옴
1882. 4월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 신헌. 김홍집 - 슈펠트 ) : 치외법권 ( 강화도 조약과 공통점) , 최혜국 대우 ,관세 규정( 강화도 조약과 차이점) , 거중 조정 규정 , 역관 이응준이 최초로 태극기 사용
위정척사 운동 - 1880's ( 정부 개화 정책 추진) : 정부 개화 정책 반대 ,이만손의 [ 영남 만인소] (1881) 🔛 [조선책략] (1880) - "친중, 결일, 연미" < 러시아 견제 목적


갑오개혁 (1894, 제도적 근대화)
1차 -전개과정 - 군국기무처 설치 (日 강요) > 군국 기무처 조선 의원 주도 개혁 ( 日 적극 개입 불가 - 청일전쟁중)
총재 : 김홍집, 부총재 : 박정양
제 1차 김홍집 내각 수립(친일)
개혁내용 - 정치 -왕실 ( 궁내부) 과 정부( 의정부) 업무 분리 , 개국 기년 사용 , 6조> 8아문 ,과거 제도 폐지,경무청 설치(근대적 경찰 제도)
도찰원 설치 (삼사 폐지)
경제 - 탁지아문으로 재정 일원화 , 도량형 통일 , 조세 완전 금납화 , 은 본위제 및 외국 화폐 혼용 ( 신식 화폐 발행 장정 제정)
사회 - 공, 사 노비법 혁파 ( > 신분제도 폐지) , 연좌제 폐지 , 조혼 금지 , 과부 재가 허용

을미사변 (1895. 8. 20 )
주도 : 미우라 공사 + 日 낭인
장소 : 경복궁 內 건청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 시해 후 옥호루애서 잠시 안치 후 불태움
작전명 : 여우사냥

제 4차 김홍집 내각 (1895. 8. 24) > 을미개혁 ex ) 단발령 (1895. 11. 15)

아관파천 (1896. 2. 11)
1년만에 고종 경운궁 (=덕수궁) 으로 환궁 (1897. 2) -러시아 공사관 인접
결과 - 갑오, 을미개혁 중단 , 친일 내각 붕괴 > 친미,친러 내각 수립 ex ) 김홍집, 어윤중 피살 ,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 본격화 ex ) 철도 , 광산, 삼림

대한 제국 (1897. 10)
칭제건원 (연호 : 광무)
즉위식 : 환구단 ( 원구단 , 1897) 과 황궁 우 (제사 사당) 건립
광무개혁 - 원칙 : 구본신참 > 위로부터 개혁 ( 윤용환 , 민영환 , 이용익의 보수 내각)
정치 - 전제 군주권 강화 <> 독립 협회 : 입헌 군주제 , 대한 국제 선포 (1899) : 교전소(1897) > 법규 교정소(1897)
원수부 설치 (1899) > 국방력 강화 ex ) 시위대, 진위대 증강


대한 매일 신보 ( 1904 - 1910 ) -베델 (치외 법권 적용) , 양기탁 , 순한글 + 영문판 + 국한문 혼용체 , 신민회 기관지 , 영향력 최대
-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기사 게제, 1910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전락








일제 강정기 사회, 경제 - 주로 1920's 문화 통치 기간
사회 운동 활성화 - 소년 운동 - 천도교 소년회 : 잡지 [ 어린이 간행] ,방정환, 일본 유학생이 주축이 된 색동회 중심
- 어린이날 제정 ( 1922) , 소년 운동 협회( 1923) , 조선 소년 연합회 (1927, 좌 . 우 합작)








1930's 독립운동 [민족 말살 통치 : 국내 독립 운동 X]
만주( 무장 독립 전쟁) - 한중 연합 작전 - 활약 - 남만주 : 조선혁명군 + 中 의용군 = 영릉가 전투 (1932) , 흥경성 전투 (1933) - 양세봉 전사

미 . 소 공동 위원회 개최 ( 서울, 덕수궁 석조전)
논의 : 정부 수립 논의 목적 ( 신탁 통치 논의 X)
전개 : 1차 ( 1946. 3 ) > 무기 휴회 ( 1946.5) - 이승만 정읍발언 (1946. 6) : 남한 단독 정주 수립 주장/
좌우 합작 위원회 ( 1946.7) - 주도 : 중도파 - 중도 좌파 : 여운형 / 중도 우파 :김규식


6月 민주 항쟁 (1987. 6) < 넥타이 시위대 ( 화이트 칼라 계층 참여) 출현
구호 : "직선제 개헌" 요구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 1) > 4. 13 호헌 조치 발표 > 이한열 사망 사건 (1987.6.9)
결과 : -6.10 국민 대회 개최 > 6. 29 민주화 선언 ( 항복 )
- 제 9차개헌 (1987.10)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5년 단임제 , 의의 : 여야 합의 개헌


출처-국사편찬위원회,위키백과,전한길필기노트 , 별별한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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