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 기원전 2000년(덧띠 새김무늬 토기와 함께 유입)
유물 : 북방식 청동기[구리 + 주석 + 아연], 간석기 농기구, 토기
청동기 무기- 비파형 동검+ 청동 화살촉 , 장신구 : 거친무늬 거울
간석기 - 반달 돌칼, 바퀴날도끼, 홈자귀, 간돌검 → 청동기는 농기구로 사용되지 않음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토기 미송리식 토기 고조선의 세력 범위에서 출토
최초의 국가 고조선
1) 건국: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군장 사회 통합(B.C. 2333년, 단군왕검)
단군 신화 기록 문헌 :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단군 신화의 내용 : 선민사상, 홍익인간(인본주의), 계급 사회, 농경 사회, 토테미즘의 존재, 유이민과 토착 세력의 결합, 제정 일치 사회
고조선의 8조법 「한서 지리지」에 3조목 수록 → 노동력 중시(보복법적 관습법), 농경 사회, 사유 재산, 계급 사회
연맹 국가 -> 왕권의 미약, 지방 분권( 옥저와 동예는 군장 사회 단계)
(가) 고구려 - [정치 체제] 5부족 연맹체(제가 회의) : 왕 - 대가(군장 : 상가, 고추가, 대로, 패자) - 관리(사자, 조의, 선인) [ 경제적 특성 ] 부경(창고) : 약탈 경제
[ 풍습 ] 서옥제, 형사취수제 , 점복 , 후장(厚葬) [ 사회 ]동맹(10월)
(나) 동예 - [정치 체제] 통합된 정치 세력 부재 (미약한 정치 세력) → 군장: 읍군, 삼로 (고구려에 수탈당하다가 복속) [ 경제적 특성 ] 특산물 : 단궁, 과하마,반어피
[ 풍습 ] 족외혼, 책화 [ 사회 ] 무천(10월) / 누에(양잠) / 여(呂) 또는 철(凸)자 가옥
금동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일본 불상 양식에 영향을 끼침
백제의 고분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의 여타 무덤과 달리, 완전한 형태로 빛을 보게 되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 연꽃 등 우아하고 화려한 백제 특유의 무늬를 새긴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았다.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주는 지석이 발견되어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왕과 왕비의 장신 구와 금관 장식, 귀고리, 팔찌 등 3,000여 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백제 미술의 귀족적 특성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무덤이다. 아울러 무덤의 연도 입구에서는 진묘수(돌짐승)가 발견되었다.
백 - 양직공도 백제 사신도(6C, 양나라, 난징)
高
백제는 마한에서 시작되었다.
근초고왕 때 中 요서 지방을 차지하였다.
무령왕때 22담로를설치하였다.
고구려와 풍습이 비슷한 나라이다.
통일 신라의 유학 - 6두품- 최치원
백월보광탑비문, 도당 유학, 빈공과 급제, 「계원필경」(현존 가장 오래된 문집), 「제왕연대력」, 해인사 묘길상탑기 , 4산비문 ,난랑비서문, 토황소격문, 「사륙집」
개혁안 10여 조 건의(894, 진성여왕) → 아찬 벼슬에 오름 but 개혁안은 진골 귀족의반대로 실현되지못함
(가) · 나제 동맹 결렬 이후
의자왕 2년(641)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였다.
( 김춘추의 사위와 딸 사망 )
(나) 백제의 멸망(660)
소정방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도성 사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백제 군사들이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왕은 태자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도주하였다. …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및 대신과 주민 12,807명을 당나라로 호송하였다. -「구당서」-
(다) 백제의 부흥 운동 (660 ~ 663)
승려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 옛 왕자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우니 서부와 북부가 모두 성을 들어 호응하였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다. 열흘이 되지 않아 돌아온 자가 3만이 되었다. 마침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부여풍은 달아나고 홀로 지수신만이 임존성 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신문왕의 개혁 정치
5년 봄에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으로 총관을 삼았다.
거열주를 승격하여 청주를 설치하니 비로소 9주가 갖추어져서 대아찬 복세로 총관을 삼았다.
3월 남원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 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 「삼국사기」
- 김흠돌 모반 사건(681)을 계기로 일부 진골숙청
- 9주 5소경(지방), 9서당 10정(군사), 달구벌(대구)로 천도 시도 but 실패
- 국학 설립(682): 유교 교육 목적
- 관료전 지급 (687) -> 녹읍폐지 (689) 의의 : 귀족의 경제 기반 약화
- 만파식적 왕실의 안정과 평화 상징 피리
3代 문왕 (대흠무 · 대흥 · 보력) - 당과 친선 / 신라와 상설 교통로(신라도) 개설 / 日 외교 문서: 스스로 고려국왕 자처, 천손(天孫) 자처 / 3성 6부제(중앙 조직), 주자감설치, '황상'이라 칭함 → 황제 국가 표방 / 중경 → 상경 천도(756) → 동경천도
후백제 건국(900, 견훤 상주의 호족 출신, 완산주에서 건국) → 견훤의 경애왕 참살, 공산 전투(927, 신승겸과 김락 전사)
고려 대외 관계의 변천
여진 12C
과정 : 윤관의 별무반 조직(1104, 숙종) → 동북9성 축조(1107, 예종) → 1년여뒤 반환(1109),
척경입비도 (윤관이 9성을 개척하고 비석을 세우는 장면 - 조선 후기 북관유적도첩)
결과 : 금 건국(1115, 송이 금에 쫓겨남송 건국) → 고려에 사대 요구→ 이자겸의 난(1126, 2) → 이자겸 사대 수락(1126, 4)
광종 (949~975)
- 광종 원년(950), 연호(年號)를 광덕(光德)이라 정하였다.
- 독자적 연호 : 광덕(950) → 후주 연호 사용 → 준풍(960) → 송 연호 사용(962)
- 광종 11년(960),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삼(紫衫)으로, 중단경 이상은 단삼(丹衫) 으로 …도항경 이상은 비삼(排衫)으로, 소주부 이상은 녹삼(綠衫)으로 하였다. 개경을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을 서도(西都)라 하였다.
- 과거제(958) :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 ( 최초 지공거 건의 ),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 등용 → 신구 세력의 교체 도모, '문' 위주로 바뀌어 가는 과정
고려 경제 활동
상업- 시전(개경 · 서경, 관청과 귀족 주로 이용) 설치, 경시서(시전의 상행위 감독) 설치, 비정기 시장(행상 활동)
고려 후기: 벽란도(예성강하구)와같은 항구발달, 원(국립 여관, 육상 교통의 요충지) 발달, 소금 전매제(충선왕)
- 화폐 유통 부진: 건원중보(성종, 동전· 철전)→ 주전도감 설치(1097, 숙종) →활구(1101, 숙종, 은병), 삼한통보 · 삼한중보 · 해동통보 · 해동중보· 동국통보· 동국중보(1102, 숙종, 동전) 자급자족 → 쇄은(충렬왕) → 지원보초 · 중통보초(원 화폐), 소은병(충혜왕)
삼별초의 항쟁
- 원종 11년(1270) 수도를 개경으로 다시 옮기면서 방(榜)을 붙여 기일 내에 모두 돌아가라고 재촉하였는데,삼별초가 딴 마음이 있어 복종하지 않았다. 그때 왕이 장군 김지저를 강화로 보내서 삼별초를 해산하고 그 명단을 작성해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더니 삼별초는 그 명단이 몽골에 알려질 것으로 우려하고 나라를 배반할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 김방경이 흔도, 홍다구와 함께 전라도의 배 160척과 수군 및 육군 10,000여 인을 지휘하여 탐라(耽羅)에 도착하였고, 적과 싸워서 죽이거나 노획한 자가 매우 많아서 적의 무리가 크게 궤멸되었다. 「고려사」
맞배지붕 ex)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팔작지붕 ex) 부석사 무량수전
우진각지붕 (궁궐문 지붕) ex 창덕궁 돈화문, 숭례문
건축 - 후기사원 - 주심포 양식(기둥 위에만 공포 o) ex) 안동 극락전(현존 최고 목조 건축물, 13C 건축),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예산 수덕사 대웅전
고려의 문화
유학의 발달 - 중기 : 보수적 ex) 문종 - 최충(해동 공자) : 9재 학당(문헌공도) 설립, 고려의 훈고학적 유학에 철학적 경향 주입
사학(사립): 고려 중기 사학 12도 융성 ex) 최충 문헌공도(9재 학당) : 9경(유교 경전)과 3사(역사서) 교육 → 관학 위축
관학 진흥책
예종 - 국자감 유학부 내에 7재(전문강좌) 설치 → 7재 중에서 무술 교육 신설 ex) 강예재 = 무학재
양현고(장학 재단), 청연각 · 보문각(학문 연구소) 설치
6조 직계제 시행
그(태종 이방원)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권세 있는 신하는 공신이든 처남이든 가리지 않고 처단하고, 6조를 직접 장악하여 의정부 재상 중심의 정책 운영을 국왕 중심 체제로 바꾸었다.
무오사화(1498, 연산군)
그날 밤 꿈에 신인이 와서, "나는 초 회왕의 손자 심인데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여 빈 강에 빠져 잠겨 있다."라고 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생각하니, "회왕은 남방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1,000여 년이나 떨어져 있 는데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쳐죽어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 글을 지어 슬퍼하였다. 김종직, -'조의제문'-
연산군 (1494~1506)
사화 발생 - 무오사화 (1498) → 사초 문제 [ 조의제문"(의제를 조문하는 글) ]
사관(사초 기록 관리) 김일손(사림) ← (김종직 제자 ) vs 훈구: 유자광 · 이극돈 - 사화 발생 → 김굉필 · 정여창 유배,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 능지처참
유향소
유향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고을 수령 다음 자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한 고을의 권세를 잡고 주관하니 이서(향리)들이 엎드려 명을 따르고 촌민들이 위세를 따른다. 유향소는 지방 수령을 견제하면서 향촌에서 사대부의 정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주던 역할을 하였다.
구성 - 향촌의 덕망 있는 인사 / 좌수 · 별감이감독
역할 - 수령 보좌 · 감시, 향리 규찰, 풍속 교정(윤리를 바로잡음)
의의: 향촌 자치
향회(총회), 향규(규칙), 향안(명단)
15C -원각사지 10층 석탑(세조)
조선 전기인 세조 때 건립된 탑 고려 경천사지 십층 석탑과 원나라 탑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화려한 조각이 돋보임
③ [통일 신라] 경주 불국사 다보탑
- 통일 신라 경덕왕때 창건된 불국사의 동쪽탑
- 통일 신라의 기존 석탑과 달리 독특한 양식이 특징
④ [백제]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 목탑의 구조를 석재로 표현하고 있는 석탑
- 1층 탑신에는 백제 멸망 후 당의 장수 소정방이 쓴 글 이 새겨져 있음
⑤ [발해] 영광탑
- 중국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만든 전탑(벽돌탑)
- 무덤 위에 벽돌로 탑을 쌓는 발해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제작됨
숙종 17C말 (1674~1720)
경신환국 (1680) 배경 : 집권한 남인 허적의 유악 사건(기름 천막 사건) · 삼복의 옥(변)
결과 : 남인 축출 ex) 윤휴, 허적 사사
서인집권 후 - 노론(강경파): 송시열, 대의명분 중시, 민생 안정 강조(보수적) / 소론(온건파): 윤증, 실리 중시, 적극적인 북방 개척 주장
기사환국 (1689) 배경 : 희빈 장씨 아들의 원자정호 문제 / 결과: 인현왕후 폐비, 서인(소론, 노론) 축출 ex) 송시열사약 →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고 남인이집권
갑술환국(1694) 배경 : 노론 일부(김춘택)가 인현왕후 복위 운동 전개 / 결과 : 장희재(장희빈 오빠)와 남인이 진압 → 숙종에게 보고 but 숙종은 오히려 남인을 축출해 버리고 서인 편을 들어줌 / 소론 집권(희빈 장씨 존중, 남구만, 박세채) ,노론· 소론의 대립이 심화됨-> 중전 장씨 "빈"강등(子:세자), 인현왕후복위→ 신사환국(무고의 옥,1701)
조선후기
대동법 - 배경 : 방납 폐단
의미: 토산물 대신 쌀 · 포(布) · 동전 징수
결과 : 양반 지주 부담 大, 농민 부담 감소 → 일시적 / 토지가 많을수록 세금 多
공인 등장 → 도고 성장, 상품 화폐 경제 발달 촉진
[ 공인 : 국가로부터 공가를 지급받아 토산품을 조달하는 어용상인 ]
정조 (1776~1800)
장용영 육성(국왕 친위 부대 ▶ 군권 장악), 대유둔전(국영 농장) 설치(← 만석거 · 축만제 · 만년제 축조)
편찬 사업 - 「대전통편」(법전), 「동문휘고」(외교 문서 정리), 「추관지」(형조 업무), 「탁지지」(호조 업무), 「무예도보통지」(병법서)
「일성록」(정조의 일기, 세계 기록 유산), 「홍재전서」(정조의 시문· 교지 등 정리), 「내각일력」(정조부터 고종까지의 규장각일기)
이익의 실학사상
국가는 마땅히 일가의 생활에 맞추어 재산을 계산하여 한전의 농토 몇 부를 한 가구의 영업전으로 만들어 주어, 농토가 많은 사람도 빼앗지 않고, …팔려고 하는 사람은 영업전 몇 부를 제외하고는 역시 허락한다. - 곽우록 -
· 이익은 천지, 만물, 인사, 경사, 시문 등 5개 부문으로 나누어 우리나라 및 중국의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소개 · 비판한 책을 지었다, 선비들도 농사를 짓고, 과거 시험의 주기를 3년에서 5년으로 늘려 합격자를 줄일 것을 주장하였다. 「성호사설」
김홍집
온건 개화파
2차 수신사(1880) → 「조선책략 」유입
군국기무처 최고 책임자
갑오개혁 단행
아관파천 후 민중에 의해 살해
임술 농민 봉기(1862, 철종)
배경 : 삼정 문란(환곡 폐단 大),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부정
주도 : 유계춘 ↔ 진압 : 안핵사 박규수
전개 : 단성에서 시작 → 진주 민란 계기로 전국적 확산
정부 대책: 안핵사 박규수의 건의에 따라 삼정이정청 설치(1862) but 시행 x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4.)
제1조 대조선국 군주와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및 그 인민은 각각 영원히 화평우호를 지키되 만약 다른 나라가 침해하는 일이 있으면 상대국에 알려 반드시 서로 돕는다.
제5조 무역을 목적으로 조선국에 오는 미국 상인 및 상선은 모든 수출입 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지불해야 한다.
제14조 조선국이 어느 때든지 어느 국가나 어느 나라 상인에게 본 조약에 의하여 부여되지 않는 어떤 특혜를 허가할 때는 이와 같은 특혜는 미합중국의 관민과 상인 및 공민에게도 무조건 균점된다.
최초 태극기 사용 / 거중조정 / 관세 규정(저율) / 최혜국 대우 -> 조·일 통상 장정 개정(1883)에 영향
서재필 - 갑신정변 가담 ,독립신문 간행 , 독립협회 조직 , 만민 공동회 주도 ,1898. 5. 미국으로 망명
독립 협회(1896. 7) 활동
1기: 영은문 x→ 독립문 건립(1898, 사바틴 설계), 모화관 x→ 독립관 건립, 공식 기관지 :(대조선)독립협회보 창간
2기: 강연회 . 토론회 개최, 정부의 이권 양도 비판(러 이권 침탈비판)-> 정부 관료 탈퇴 → 민중 지지 ▲
3기: 만민 공동회 개최(1898. 3~ 종로) →국민 지지 바탕으로 진보 내각 출범
부산
신석기 시대 - 부산 동삼동 유적(토기 출토)
조선 - 왜관 설치 , 임진왜란 때 부산진(정발) · 동래성(송상현) 전투 , 내상의 근거지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1876)
(나) 위정척사 운동(1870년대 개항 불가론)
일단 강화를 맺고나면 저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 지나치게 사치하고 기이한 노리개로 공산품이며 그 양이 무궁합니다. 우리의 물화는 모두가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이고 땅에서 나는 것으로 한정이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피와 살이 되어 백성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저들의 사치하고 기이하며 심성을 좀먹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물화와 교역을 한다면 그 양은 틀림없이 1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몇 년 안 지나 땅과 집이 모두 황폐하여 다시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나라 또한 망하게 될 것입니다. … 저들 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양 오랑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강화가 이루어지면 사악한 서적과 천주교가 다시 들어와 사악한 기운이 온 나라를 덮게 될 것입니다. - 최익현, 「면암집」 -
(가) 을사늑약 이후 의병활동(1905)
면암 최익현(1883~1906)
상소 - 경복궁 중건 반대 상소(1868) / 흥선 대원군하야 상소(1873) : 서원 정리 반대 / 5불가소(1876) 강화도 조약 반대
의병 - 을사의병(1905) 포고팔도사민 / 병오의병(1906)
포고팔도사민(최익현)
난신적자가 어느 때인들 없으리요마는 어찌 이번 같이 도장을 마음대로 찍고 조약을 맺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사5적) 같은 자들이 있겠습니까.
방곡령 선포
·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곡물을 대량으로 사들여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곡물 값이 뛰어올라 가난한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흉년이 들어 곡물이 크게 부족해지자, 여러 지역의 지방관이 방곡령을 내렸다. 예를 들어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미리 통보 한다. "라는 조·일 통상 장정(1개월 전 통보규정)에 따라 외교 담당 관청에 통고하고 방곡령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통보를 늦게 받았다는 구실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방곡령을 철회시켰고, 막대한 배상금까 받아냈다.
조·일 통상 장정(무역 규칙 수정, 1883. 7.)
제37조 만약 조선국에 가뭄, 수해, 병란 등의 일이 있어 국내 식량 결핍을 우려하여 조선 정부가 잠정적으로 쌀의 수출을 금지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 영사 관에 통고해야 한다.
제40조 조선 화폐에 의한 관세 및 벌금 납입을 규정한다.
제42조 … 현재 혹은 장래에 조선 정부가 어떤 권리와 특전 및 혜택을 다른 나라 관민에게 베풀면 일본국 관민 또한 즉시일체 균점한다.
(나) 최승로 시무 28조 [ 유교 정치 실현 ]
불교를 믿는 것은 수신의 도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의 본입니다. 몸을 닦는 것은 내생(來生) 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오늘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또한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려사」-
(다) 정도전의 불씨잡변
저 불씨는 사람이 사악한지 정의로운지 올바른지 그른지는 가리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부처에게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이것은 비록 열 가지의 큰 죄악1을 지은 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면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령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올바른 도리가 아니므로 징계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불씨의 가르침이 일어난 후 오늘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 부처 섬기기에 매우 독실했던 양 무제(梁武帝)나 당 헌종(唐憲宗)과 같은 이도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한퇴지(韓退之)가 “부처 섬기기를 더욱 근실하게 할수록 연대(年代)는 더욱 단축되었다”고 한 말이 또한 매우 깊이 있고 분명하지 않은가? 『삼봉집』권9, 『불씨잡변』 [출처-국사편찬위원회]
(가) 이황 - 이기호발설
4단과 7정은 다 같이 하나의 정감이지만 4단은 인의예지라는 본성에서 발동해 나오고, 7정은 기 질에서 발동해 나온다. ❻ 4단은 이치가 발동하여 기운이 따라오는 것이고, 7정은 기운이 발하여 이치가타고 올라오는 것이다. -논사단칠정서-
(라)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
1909년 『서북학회월보』에 게제된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유교의 개량과 구신에 관한 유교서.
내용은 유교계의 3대 문제와 유교를 개혁,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문제는 유교파의 정신이 전적으로 제왕편에 있고 인민 사회에 보급할 정신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
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교 활동: 파리 위원부(1919, 김규식), 구미 위원부(1919, 이승만)
독립 의식 고취 사료 편찬소 : (「한일 관계 사료집」간행) → 이를 참고하여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지음(1920)
1907. 4. 헤이그 특사 파견
ex 헐버트 +이준 · 이상설 · 이위종→ 실패(日)· 영의 방해 을사늑약에 의한 외교권 박탈
1899 전차(서대문~청량리), 경인선 개통, 내부병원(최초의 국립병원)
대한 제국(1897. 10)
광무개혁 - 정치 - 대한국 국제 선포(1899): 교전소(校典所, 1897) → 법규 교정소(校正所, 1899)
보안회 (1904. 7. 13.)
日 황무지 개간(토지약탈 목적) 반대 → 철회 성공 cf ) 스스로 개간 위해 농광 회사 설립(1904. 7. 11)
종로에서 민중 대회 개최 / 보안회 회장: 신기선, 송수만 주도 → 협동회로 변경(1904. 9. 11), 협동회 회장 :이상설
제1차 조선 교육령(1911)
제1차 조선 교육령에서는 '총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과 '시세와 민도(民渡)에 맞도록 교수하는 것을 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보통 학교 교육 기간은 4년으로 하였으며 고등 교육 기관인 대학은 설치하지 않았다. 이 시기 교육 정책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소한의 사회적 능력을 갖춘 조선인을 배출하기 위한정책이었다.
제1조 조선에 있는 조선인의 교육은 본령에 따른다.
제3조 교육은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을 기한다.
제5조 보통 교육은 보통의 지식, 기능을 부여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며, 국어(일본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6조 실업 교육은 농업, 상업, 공업 등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8조 공립 또는 사립의 보통 학교, 고등 보통 학교, 여자 고등 보통 학교 등의 설치 또는 폐지는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1922~1924)
주도 : 조선 교육회, 회장 :이상재(우익) 주도 →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목적 : 고등 교육 기관 설립(문맹 퇴치 운동과는 상관 없음)
2차 교육령(1922) 대학 설립 규정 but 설립X
구호 : "1천만이 1원씩" → 모금 운동
결과 : 모금 부진 - 민중 소극적, 수재 . 가뭄 , 일제 방해 ex) 경성 제국 대학 설립(1924)
민족 유일당 운동 ( 좌 · 우합작 운동 ) - 배경 - 국내 : 6 · 10 만세 운동(1926), 치안 유지법(1925), 기회주의자(이광수)
우리가 승리를 향해 구체적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건을 충분히 이용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따라서 ❹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분명히 인식함과 동시에 과정상의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하게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개량적 이익을 위해서도 종래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싸워야 할것이다.
정우회 선언, - 1926. 11.17. -
특히 정치투쟁을 강조하고,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주장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등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출처 - 우리역사넷)
신간회
직접 배경 : 정우회 선언 (1926. 11) → 자진 해산(1927. 2) → 신간회 탄생(1927. 2)
- 초대 회장: 이상재(우익) / 부회장 : 홍명희(좌익)
강령 - 민족 단결, 기회주의자 배격, 정치 · 경제적 각성 촉구
1930's 독립운동
[ 민족말살통치 : 국내 독립운동X ]
조선의용대 (1938, 한커우) 활동 : 항일전 수행(中국민당 지원 下) ex) 포로 심문, 정보 수집 ,후방 교란 /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인 군사 조직
한국 광복군(1940. 9.)
한국 광복군의 초기 편제는 충청에 총사령부 외에 시안에 제1지대와 제5지대, 수원성 바오터우에 제2지대, 안휘성 푸양에 제3지대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의용대가 합류하면서 편제가 개편되었다. 즉, 조선 의용대를 제1지대로, 기존의 제1, 2. 5지대를 합쳐 제2지대로, 부양에 있던제 3지대는 그대로 존속시켜 3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초기 시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더불어 동시(童詩)에 깃들인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현실 파악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는 「겨울」·「조개껍질」·「버선본」·「햇빛·바람」 등이 있다.
「서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 헤는 밤」·「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윤동주(尹東柱))]
1930년대 민족 말살 통치
·황국 신민 서사(1937)
1. 우리는 황국 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 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고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 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조선 총독부, 「시정 30년사」, 1940 -
지금 조선 지방 2,300만 주민은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을 조직하고, 일제히 황국 신민 서사를 제창하여 신애 협력하고, 내선일체의 성심을 나타내며 충군애국의 열기에 불타서
모두 한결같이 황국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일제의 초등 국사 제6학년 교과서, 1941-
국가 총동원법(1938. 4.)
제1조 국가 총동원이란 전시(전시에 준할 경우도 포함)에 국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 전력 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하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운용하는 것이다.
제4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상 필요한 때에는 칙령이 정한 바에 따라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할 수 있게 한다.
제7조 정부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노동 쟁의의 예방 혹은 해결에 관한 명령, 작업소 폐쇄, 작업 혹은 노무의 중지 … 등을 명할 수 있다.
제8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상 필요할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물자의 생산·수리· 배급·양도, 기타의 처분, 사용·소비·소지 및 이동에 관하여 필요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제20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상 필요한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신문지, 기타 출판물의 게재에 대하여 제한 또는 금지를 행할 수 있다.
-조선 총독부, 「조선법령집람」 제13집, 1938
38도선 분할 - 남 : 미 군정 실시(1945. 9.8.~1948. 8. 15.), 미군의 직접 통치 →한국 민주당 지원 →북: 소련의 간접 통치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 12. 미·영·소)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김구 중심) + 독립촉성 중앙협의회 (이승만 중심) 대한독립촉성국민회(1946. 2.)
황성옛터
한국 최초의 남성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의 추천으로 동방예술단(東方藝術團)이라는 순회 극단의 효과 음악과
막간 반주 음악 연주자로 입단한 전수린이 어느 날 그의 고향인 개성에 들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황성옛터(荒城옛터))]
개성(송악)
개성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 조인
4·19 혁명(1960. 4)
배경 : 3· 15부정 선거
전개 : 마산 의거(3. 15) → 김주열 시신 발견(4. 11) → 고려대 학생 시위(4. 18) → 서울대 학생 시민 대규모 시위(4 · 19 혁명) →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 속출 → 계엄 선포(4. 19) → 장면 사임 후 이승만 하야 요구(4. 23) → 대학교수 시위(4. 25) → 이승만 하야(4. 26)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
새마을 운동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마을 운동 : 농어촌 생활 근대화 운동 - 전 국민적인 의식 개혁 운동
노무현 정부
2007. 제2차 남북 정상 회담 -> 10 · 4선언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
경의선 · 동해선 철도 연결(2007)
출처-전한길필기노트.신영식간편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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