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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는다/한국사

한능검 59회 문제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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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이동 생활 : 사냥이나 어로, 채집 생활을 영위
도구의 사용 : 처음에는 찍개 같은 도구를 여러 용도로 사용했으나 뗀석기 제작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용도가 나누어짐
무리 사회 : 구석기인은 가족 단위를 토대로 무리를 이루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언어를 사용하였고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이 발생함
평등 사회 : 무리 중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권력을 갖지는 못해 모든 사람이
주거 생활 : 대부분 동굴에 거주하였으며, 바위 그늘이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거주하기도 함

고조선

요서를 경계로 연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강성 (B.C. 4세기말~3세기 초)

신라 - 7C

  • 선덕여왕 (인평)
  • 백) 의자왕의 공격 → 대야성 함락(642, 김품석 사망) →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움 요청 → (고)연개소문)거절 →신라의 대당 외교
  • 648 나 · 당 연합 결성(진덕여왕)
  • 660 백제 멸망(의자왕 + 황산벌의 계백 ↔ (신)무열왕 + 김유신
  • 660~663(백)부흥 운동 - 복신·도침(주류성 , 충남한산) 흑지상지 · 지수신(임존정, 충남 예산) +왕자 부여풍 日 수군의지원:백(촌)강전투(663)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주청(奏請)으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고 했으나,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의 명으로 연개소문이 642년 1월부터 그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천리장성(千里長城))]



백제 성왕

538 사비 천도
·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빼앗김
·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통일 신라

경주 석굴암 본존불상
화강암을 쌓아 동굴처럼 만든 석굴암 중앙에 위치한 불상으로, 통일 신라의 수준 높은 조각 기술을 보여줌


외사정 파견: 지방관 감찰 → 문무왕

문무왕은 당을 축출하여 통일을 완수한 후 지방관 감찰을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다.

통일신라 경제 활동

무역 발달

  • 최대 무역항 : 울산
  • 대당 무역 번성 - 공무역뿐만 아니라 사무역도 발달
  • 무역로 [ 남로전남 영암 → 상하이, 북로 경기 남양만(당항성) →산둥반도]
  • 산둥반도와 양쯔강하류에 신라방 · 신라촌(신라인 거주지), 신라소(관청), 신라관(여관), 신라원(절) 설치
  • 수출품: 금· 은세공품 인삼, 모피류 등/ 수입품: 비단 · 서적 등 귀족의 사치품
  • 대일 무역 : 처음에는 무역 제한, 8C에 이르러 활발
  • 이슬람상인의 울산항 내왕
  • 장보고의 활동 - 완도에 청해진 설치(828, 흥덕왕) → 해적 소탕→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 장악, 산둥반도에 법화원 건립
  • 교관선(무역선), 견당매물사(당)무역사절), 회역사(日 무역사절)
  • 「입당구법순례행기」: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나라를 여행한일본 승려 엔닌의 여행기


발해 국왕의 업적


무왕 - 인안 연호 사용, 산둥반도 공격(장문휴), 일본과 친선
문왕 - 대흥 연호 사용, 당과 친선 관계, 신라도 개설, 3성 6부 완비
선왕 - 건흥 연호 사용, 고구려 옛땅의 회복, 해동성국이라 불림, 지방제도 완비(5경 15부 62주의 지방 조직) 통치 체제
중정대(감찰), 문적원(서적 관리), 주자감(최고교육기관 - 문왕)

(나)
태조- 역분전 지급(940)

(다)
고려 광종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로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다(958)

(가)
고려 경종 때 모든 전 ·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관품과 인품· 세력을 반영하여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으며,
처음으로 직관(職官) · 산관(散官) 각 품의 전시과가 제정되었다(976)

(라)

고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따라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인 외관(外官)을 두었다(983)



별무반의 여진 정벌

별무반은 고려 숙종 때 여진 정벌을 위해 윤관의 건의로 조직된 특수 부대로,
고려 예종 때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 9성 일대를 확보하였다(1107).

(가) 이자겸의 난
인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권력을 독점했으나, 인종은 이를 평정한 후 왕권 회복과 민생 안정을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1126)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김부식 제압 묘청의 서경파가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 금국 정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개경파의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 의 공격으로 진압되었다(1135)


(나) 무신 정변
정중부 · 이고 ·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살해한 후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옹립하였다(1170)

공민왕의 개혁 정치


반원 자주 정책
· 원의 연호 폐지 · 친원파 숙청 ·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 원의 관제 페지 · 쌍성총관부 공격으로 철령 이북 땅 수복 · 동녕부 요양 정벌 · 원(나하추)의 침입 격퇴
· 친명 정책 전개 · 몽골풍의 폐지

대내적 개혁 정책
· 정방 페지 · 신돈의 등용 · 전민변정도감 운영 · 국자감→ 성균관으로 개칭 · 유학 교육 강화 · 과거 제도 정비

거란의 침입 대비 → 강감찬 : 나성 축조

강감찬은 귀주 대첩에서 승리한 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수월관음도는 고려불화(高麗佛畵)의 주요 도상(圖像)으로 채택되어 많은 사례를 남기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흔하게 접할 수 없는 불화 가운데 하나이다.

청자 상감운학무늬매병
고려만의 독자적 기술인 상감 기법이 사용된 청자, 12세기중반이후 상감 청자유행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 배흘림기둥, 팔작지붕

원 간섭기의 사회 모습

고려 원 간섭기에는 왕이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하였는데, 제국 대장 공주는 충렬왕의 왕비이다.
이 시기에 원의 풍습인 변발과 호복이 지배층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일연: 「삼국유사」
단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은 것으로 기록하여 원형에 충실한 서술을 하고 있으며, 고조선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단군부터 고려 말까지의 불교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기사본말체 형식의 사서이다.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보아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으며
그 외에 가야에 대한 기록과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 불교 설화, 향가 등을 수록하였다.

태종

  • 두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즉위
  • 왕권강화: 6조 직계제 실시(의정부의 역할 약화), 사병 폐지
  • 통치 체제 정비: 문하부낭사(간쟁 담당)를 분리하여 사간원으로 독립시킴, 6조체제정비
  • 사원의 토지와노비 몰수, 양전사업 · 호패법 실시(경제기반확충), 신문고 설치

계유정난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 대군이 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안평 대군을 축출한 후 권력을 장악하였어요.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나 계유정난이라고 합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 대군은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어요(제7 대 세조).

세조

계유정난으로 정권 장악 → 단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즉위, 단종 복위 운동 진압(성삼문 등 주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가) 무오사화 (연산군)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훈구 세력이 문제 삼아 사림 공격 → 김일손 등 사림 세력 제거, 김종직 부관참시, 영남 사림 몰락

갑자사화 (연산군)

  •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사사 사건 폭로
  • 폐비 윤씨 사사 사건에 연루된 한명회 등 부관참시, 김굉필 등 사림 대부분 몰락


(나) 중종반정(1506) - 초기: 왕권↓, 훈구파집권


광해군의 정책


   교역재개
에도 막부의 통교 허용 요청 → 기유약조체결(1609)












유득공: 「발해고」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를 북국, 신라를 남국으로 칭하며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였다.
규장각 검서관: 조선 정조 때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출신의 학자들을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하였다.

외규장각의궤 약탈 → 병인양요

프랑스는 병인박해 때의 프랑스 신부 처형을 구실로 로즈 제독의 함대가 양화진을 침입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고, 철군 시 문화재에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의 의궤도 국외로 약탈하였다(1866)






갑오개혁 이후 고종의 교육 입국 조서 발표에 따라 교원 양성을 위한 한성 사범 학교가 설립되었다(1895)

만세보 → 천도교 기관지: 오세창

만세보는 천도교의 후원을 받아 오세창이 창간한 천도교 기관지로, 사회진보주의를 제창하고 일진회의 <국민신보>에 대항하였으며 이인직의 <혈의 누>를 연재하였다.










출처 - 별별한국사, 전한길 필기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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