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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는다/한국사

한능검 54회 오답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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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

제천행사 - 무천(10月)

위치 , 경제 - 해산물 풍부, 평야지대 ( 고구려의 압박 ) / 특산물 : 단궁, 과하마,반어피
군장 . 국가 - 고구려의 압박으로 크게 성장하지 못함. 군장 국가. 王 X , 후. 삼로 . 읍군이 통치
기타 - 책화 : 다른 부족의 영역 침범시 노비. 소. 말로 변상 - 폐쇄적인 씨족 사회의 전통 , 족외혼, 철(凸)자형, 여(呂)자형 집터, 방직 기술 발달 ex) 누에를 치고 명주. 삼베 생산

출처-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과하마(果下馬)
말을 타고 과일 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키가 작은 말을 뜻한다.
반어피(斑魚皮)
바다표범의 가죽

신라 법흥왕의 정책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내용을 통해 밑줄 그은 '이 왕'이 신라 법흥왕임을 알 수 있어요.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법흥왕 때 세워진 비석입니다. 법흥왕은 지증왕 때의 체제 정비를 계승하여 통치 체제를 완비하였어요.
먼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병부를 설치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어요.
또한, 법흥왕은 불교를 진흥하고자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다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어요.

사신도(四神圖)

고구려 고분벽화로 요동성총(遼東城塚) 등 4∼5세기 고분에서부터 사신도가 등장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사신도(四神圖))]

고구려 - 초기 : 돌무지 무덤
- 돌을 정밀하게 쌓아 올려 만든 무덤, 청동기 ~ 삼국시대 형성
- 만주의 집안(지안) 일대 ex) - 태왕릉 (벽화 X) / 장군총 (벽화X ) : 7층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

- 후기 : 굴식 돌방무덤
- 돌로 널방을 짜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것 /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안약 등지 분포
- 도굴 용이, 시신 추가 매장 가능(합장릉) , 모줄임 천장구조
- 벽화O - 초기 : 생활표현 ex ) 각저총의 씨름도 , 무용총의 무용도와 수렵도
후기 : 추상화 ex ) 강서대묘의 사신도 , 국내성의 오회분의 달의 신 . 해의 신과 사신도 및 별자리 그림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출처- https://blog.daum.net/bosar/13432894

주요연표

660 백제 멸망 , 웅진도독부 설치 663 계림 도독부 설치 , 백강 전투 (금강 하구) 665 취리산 회맹 668 고구려 멸망 , 안동 도호부 설치 671 소부리주 설치 674 안승이 보덕국왕으로 추대 675 매소성 전투 676 기벌포 전투

668 고구려 멸망 ( 보장왕 🔛 신) 문무왕 ) 🔜 670 ~ 673 고) 부흥 운동 - [ 고연무 ( 오골성) , 검모잠 ( 한성) ] + 왕자 안승(금마저) + 신) 지원 -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왕 (670) > 보덕국왕( 674) 임명 > 신문왕 때 진골 신분 부여, 경주 안치 (683) > 안승의 조카 대문의 반란으로 보덕국 폐쇄 (684)

신라와 당의 전쟁
사찬 사득이 수군(기벌포 해전 676)을 거느리고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당의 설인귀와 스물 두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이기고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 삼국사기 ]

(나)

(김헌창의 난 822)
헌덕왕 14년 (822) , 웅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네 주와 국원경 . 서원경. 금관경 및 여러 군현의 수령을 협박하여 부하로 삼았다.

(다)

서기 838년, 민애왕(閔哀王)이 즉위하였다. 성은 김씨, 이름은 명(明)으로 원성왕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왕은 일찍부터 벼슬을 하여 상대등이 되었다.
시중 이홍과 더불어 희강왕을 협박하여 죽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2월에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아찬 우징을 찾았다.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도 임금과 아버지를 함부로 죽였으니,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원하오니 장군의 병사를 빌어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가)

농민 반란 (초적) > 호족 세력으로 흡수
10년(896), 도적들이 나라 서남쪽에서 일어났다. 붉은 바지를 입어 구분하였기에 사람들은 적고적이라고 불렀다.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경주)의 서부 모양리까지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 삼국사기 -


출처- 국립익산박물관
출처 - 국립익산박물관

후백제 (900) - 견훤 ( 상주 호족 아자개의 아들) , 완산주 ( 전주) 에 도읍 , 신라의 무장(군진 > 호족) /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도 . 전라도 지역 차지 ( 군사적 우위) , 중국과 외교 관계 (후당. 오월 등) / 신라에 적대적 (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킴) , 과중한 조세 수취 , 호족 포섭 실패

후백제 멸망

  •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을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 이찬 능환이 양건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견훤을 금산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였다. … 견훤이 태조에게 만나 주기를 요청하자 태조가 기뻐하며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치하여,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고려의 경제 상황

인품을 배제하고 관직과 위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전지와 시지를 지급한다는 내용을 통해 밑줄 그은 '토지 제도'가 고려의 전시과 제도임을 알 수 있어요.
전시과는 경종 때 처음 마련되었는데, 이때에는 관품과 인품을 기준으로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어요. 이후 목종 때 제도가 개정되어 인품을 배제하고 관직을 기준으로 등급에 따라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습니다. 전시과는 이후에도 몇 차례 개정되었습니다. 고려에서는 국가 주도로 삼한통보, 해동통보 등 화폐가 발행되었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였어요.

출처- 별별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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