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법
1.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2. ❶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한다.
3.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4. ❷ 투기가 심한 부인을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를 서울 남쪽 산 위에 버 려서 썩게 한다. 단,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고 할 때에는 소 와 말을 바쳐야 한다.
도둑질하면 12배 배상 ❶ 부여는 절도죄에 대해 12배로 배상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의 법률에도 영향을 미쳤다.
❷ 가부장적 사회 모습과 일부다처제 사회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부여의 풍속
이 나라는 구릉과 넓은 못이 많아 동이 지역 가운데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을 가꾸기에 알맞지만, 과일은 생산되지 않는다.
❶ 사람들 체격이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 용맹하며 근엄하고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았다. …… ❷ 은력(殷暦)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에서 대회를 열어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영고(迎鼓)라고 한다. 이때 형옥(刑獄)을 중단하여 죄수를 풀어 주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옷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 사람이 죽으면 여름철 에는 모두 얼음을 사용하여 장사를 지냈다. ……장사를 후하게 지냈으며, 곽(柳)은 사용하였으나 관(棺)은 쓰지 않았다.…… 한나라 때에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을] 현토군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영고, 우제점복, 흰옷, 왕의 장례에 옥갑 사용
❶ 부여는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군사적으로 충돌하지 않았으므로 우호적으로 묘사되었다.
❷ 수렵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던 부여에서는 12월에 제천을 거행 하였다.
옥저의 풍속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는데 개마대산은 큰 바닷가에 맞닿아 있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중략)…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보전(步戰)을 잘 한다. 음식. 주거. 의복. 예절은 고구려와 흡사하다. 그들은 장사 지낼 적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척이나 되며 한쪽 머리를 열어 놓아 문을 만든다. ❶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을 하되 겨우 형체만 덮일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한다.
가족 공동 무덤(골장제)
❶ 옥저는 장례 풍습으로 골장제(가족 공동 무덤)가 있었다.
옥저의 민며느리제
여자가 10살이 되면 혼인을 허락한다. 남편이 될 사람이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길러서 아내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이때 여자의 집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돈이 지불되면 다시 사위 집으로 돌려보낸다.
충주(중원) 고구려비
5월 중에 고구려 대왕이 상왕공(相王公)과 함께 신라의 매금(寐錦 : 왕)을 만나 영원토록 우호를 맺기 위해 중원(中原)에 왔으나, 신라 매금이 오지 않아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고구려 대왕은 태자공 전부(前部), 대사 자 다우환노(多于桓奴)가 이 곳에 머물러 신라 매금을 만나게 하였다. ...(중략)… 신라 매금이 신하와 함께 고구려의 대사자 다우환노를 만나 이 곳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당주(幢主)인 발위사자 금노(錦奴)로 하여금 신라 국내의 중인(衆人)을 내지(內地)로 옮기게 하였다.
고구려 대왕, 신라 매금
충주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5세기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지역을 복속하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대왕'이라 표현하고, 신라를 '동이', 신라왕을 '매금'이라 칭하는 것을 통해 당시 고구려 국력의 강대함과 독자적 천하관을 보여준다.
만파식적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바치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❶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용이 되셨고, 유신은 천신이 되셨는데, 두 성인이 저를 시켜 이를 바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중략)… ❷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도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피리(만파식적)
❶ 문무왕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❷ 만파식적은 통일 신라 전제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민정문서
사해점촌(沙割漸村)의 경우 ❶ 호는 11호인데 중하(中下) 4호, 하상(下上) 2호. 하하(下) 5호이다. 인구는 모두 147명인데 ❷ 남자는 (丁)이 29 명(노비1명), 조자(助子) 7명(노비1명), 추자(追子) 12명, 소자(小子) 10명, 3년간 태어난 소자 5명, 제공(除公) 1명이고 여자는 정녀(丁女) 42명(노비 5명) 조여자(助女子)9명, 소여자(小女子) 8명, ❸ 3년간 태어난 소여자 8명 (노비 1명), 제모(除母) 1명과 ❹ 다른 마을에서 이사 온 추자 1명, 소자 1 명 등이었다. 말은 22마리에 3마리가, 소는 17마리에 5마리가 보태졌다. 논은 102결 정도인데 관모전(官謀田) 4결, 내시령답(內視令沓) 4결, ❺ 촌민이 받은 것은 94결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19결은 촌주가 받았다. 밭은 62결, 마전(麻田)은 1결 정도이다. 잣나무는 862그루가 있었고 34그루를 심었다. 호두나무는 74그루가 있었고 382그루를 심었다.
자료해석
1. 발견 장소 : 일본의 동대사에 있는 정창원(1933)
2. 조사 지역 : 서원경(청주) 지방의 4개 촌락
3. 작성
시기: 경덕왕(8세기 중엽 추정)
목적: 노동력과 생산 자원의 편제. 관리 → 부역 동원과 조세 징수의 기준 마련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다시 작성
4. 조사 대상 : 호구, 인구, 토지, 수목(뽕· 잣· 호두), 가축(소 말) 등
호구 : 사람의 다소에 따라 9등급
인구 : 연령, 성별에 따라 6등급
토지 : 내시령답, 관모답, 촌주위답, 연수유답(백성)
❶ 호는 상상부터 하하까지 9등급으로 구분하였다.
❷ 인구는 나이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❸ 3년마다 민정 문서를 작성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❹ 촌민들은 거주지를 옮길 수 있었다.
❺ 연수유전은 농민의 사유지 및 경작지를 지칭하는 것이며, 촌주위답은 촌주에게 주어진 토지 를 말한다.
출처-2022 고종훈 한국사 사료분석 노트
'오늘도 읽는다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근현대 사료 ] 4.19 선언문 , 3차개헌 , 유신 헌법 (0) | 2021.12.13 |
---|---|
한국사 사료분석 근현대 - 강화도조약, 갑신정변, 톈진조약 (0) | 2021.12.09 |
한능검 54회 오답노트 (0) | 2021.10.27 |
한능검 오답노트 55회 (0) | 2021.10.21 |
한능검 대비 유물 유적 공부 (0) | 2021.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