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침투부에서 '주기에르 살리에르' 편에서 주호민 작가님이 아마데우스 영화에 관한 내용을 말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냥 모차르트가 천재니까 주변에 시기하는 사람도 그만큼 많았겠지 하고 넘겼었는데 이번에 읽고 있는 책 [ 독살로 읽는 세계사 ] 로 보니 소문으로 인해 누군가는 천재성이 돋보이게 되어 남은 사람들의 부를 얻고 그로인해 누군가는 희생양이 된다는 점이 참..
아마데우스
Amadeus, 1984
[ 오스트리아 궁전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91년 11월 20일 고열과 부종에 시달리다가 쓰러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2월 5일 결국 숨을 거두었다. 위대한 작곡가가 고통 속에서 숨지자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라이벌인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질투심에 불타서 그를 독살 했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모차르트의 시신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풍겼으며 얼굴과 몸은 잔뜩 부어서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18세기 후반 사람들은 음악계가 선사하는 기쁨 덕분에 실망할 틈이 없었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궁의 몇 안되는 자리를 차지하고자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그런 삶을 잘 알았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잘츠부르크궁에서 부악장 혹은 음악 감독으로 일했으며 두아이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 레오폴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의 화려한 궁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두 아이의 재능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모차르트는 혀를 내두를 만큼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악기와 목소리로 구성된 작품을 듣고 집에 와서는 그대로 옮겨 적었다. 열한 살이 될때까지 그가 작곡한 가곡, 춤곡, 교향곡을 합치면 100곡이나 되었다. 그는 병치레가 잦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쉼 없이 정진했다. 레오폴트는 각 지역의 궁에서 아들이 연주할 만한 자리를 물색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음악가가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길은 재능에 걸맞는 봉급을 받는 것뿐이었다. 당시에는 저작권이나 로열티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첫 번째 공연에 대해서만 돈을 받았다.
어린 시절 모차르트의 엄청난 재능을 생각하면 그가 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우선 그는 유럽 왕실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법이 없었으며 때로는 대놓고 무시했다.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오직 재능만이 고귀함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가 너무 건방졌던 나머지 아버지가 일하는 잘츠부르크궁의 시종장은 그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면서 궁 밖으로 내쫓았다.
다른 이유는 국적 때문이었다. 당시 궁에서는 이탈리아인 음악가를 고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음악은 혁명적이고 난해했다. 그는 부자와 귀족들을 즐겁게 해주는 상투적이고 편한 음악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흔드는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었다. 물론 성악곡도 작곡했지만 가수보다 음악 자체를 돋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청중 뿐만 아니라 오페라 가수들의 기분까지 상하게 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대중적인 음악을 작곡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빚과 가난에 시달렸지만 방이 8개에 마구간까지 딸린 집에 살면서 화려한 마차를 가지고 있었다. 25세가 된 모차르트는 예술가로서나 자연인으로서나 아버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날개를 마음껏 펼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1781년 3월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이자 재능있는 음악가의 모임이 열리는 빈으로 갔다.
모차르트는 음악원과 공연장, 부유한 후원자들의 집에서 연주를 하며 돈을 벌었지만 재능이 부족한 음악가들보다 일은 더 많이 하고 돈은 적게 벌었다.
빈에서 모차르트의 주요 경쟁자는 세 개 언어로 오페라를 만든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였다. 그는 모차르트 경력을 쌓던 시기에 빈의 오페라계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1788년에는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자기가 변변한 자리를 얻지 못하도록 살리에리와 그의 추종자들이 방해한다고 불평했다.
그럼에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서로를 음악적으로 존경한 듯 하다.
1785년에는 칸타타를 함께 작곡했으며 살리에리는 1788년에 자신의 오페라 대신 모차르트의 < 피가로의 결혼>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모차르트는 진중하고 근엄한 살리에리와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그에게 피아노를 배운 제자 한 명은 "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창백했다. 상냥한 인상에 눈빛이 빛났지만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라고 썼다.
1984년에 개봉한 영화 < 아마데우스>는 장난기 많고 저속한 농담을 즐기며 남을 웃기기 좋아하는 모습을 통해 모차르트의 조증을 잘 보여준다.
1782년 레오폴트가 늘 두려워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들의 결혼이었다.
다시는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787년에 레오폴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두사람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이 궁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얻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의 간절한 바람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죽은 직후에 이루어졌다.
요제프 2세가 모차르트를 궁정음악가로 고용해서 미뉴에트를 작곡하도록 한 것이다.
말년에 모차르트는 네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엄청난 수입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옷과 콘스탄체에게 줄 선물을 마구 사들이고, 값비싼 음식을 먹으며 도박을 하는데 돈을 펑펑 썼기 때문에 늘 빚에 쪼들렸다.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결국 열병에 걸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자기 몸을 혹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병이 낫지 않았다. 의사 두 명이 2리터에서 3리터 정도의 피를 뽑은 탓에 체력이 더 떨어졌다.
다음 날 모차르트는 몸을 떨며 갈색 거품을 토하고 나서 결국 숨졌다.
미망인이 된 콘스탄체는 친구들에게 남편이 열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유산은커녕 산더미 같은 빚을 떠안게 된 그녀는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독살에 대한 소문을 부채질 했다. 어쨌든 콘스탄체는 황제에게 부조금을 받았으며 죽은 남편의 작품으로 음악회를 열었다. 병에 걸려 평범하게 죽은 사람보다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의 음악이 더 흥미로운 법이라 콘스탄체는 금세 부자가 되었다.]
- 도서출처 [독살로 읽는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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